일본에서 귀국한 함석헌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쳤다. 그해 9월, 자신의 집에서 지내던 오산학교 졸업생 두 사람이 ‘신의주 공산주의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석헌도 일주일간 정주경찰서에서 유치장에 구금된다. 1938년 3월 오산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약 2년간 오산에서 과수원을 경영했다. 1940년에는 평양 송산에서 김혁이 경영하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하여 경영하는 중 김혁이 계우회(溪友會) 사건으로 동경에서 체포되자 그도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년간 구류를 살았다.
1942년에는 용천으로 돌아가 기거하던 중 그해 5월에 〈성서조선〉에 쓴 김교신의 “죽은 개구리를 슬퍼한다”는 의미의 글 “조와”(弔蛙)를 문제 삼은, 이른바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동료 동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1년간 복역했고, 1943년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1945년 해방을 맞게 되는데,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제가 물러간 뒤 용암포 자치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신의주 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사령부에 다시 체포되어 50일간 구금된 일이 있고, 이후에는 공산당에 체포되어 한 달 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월남 후 종교 사상가로 활동
공산정권 하에서의 자유로운 삶이 불가능하여 월남을 결심한 그는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고, 1948년부터 서울 YMCA 강당에서 일요종교집회를 개최하며 종교사상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시작하는데, 첫 논설이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였다.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때는 모두가 침묵했으나 그해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군사혁명을 비판하면서 사상가 혹은 사회평론가로 인정을 받았다.
함석헌은 1957년 이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운영하던 중 미국 퀘이커교의 초청으로 1962년과 1979년 미국을 방문했고, 특히 1962년에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로 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1970년 4월에는 사회평론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이를 통해 민중계몽 및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제3공화국의 독재에 저항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이 잡지는 전두환으로 대표되던 신군부 권력에 의해 1980년 1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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