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건설의 신학
이렇게 볼 때 한상동 목사의 생애는 네 가지 측면, 곧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저항과 반대(1936-1945), 해방 후 경남노회에서의 교회쇄신운동(1945-1952), 초량교회와 삼일교회에서의 목회활동(1946-1974), 그리고 고려신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활동(1946-1974)으로 정리될 수 있다.
한상동 목사에게 신학 혹은 신학적 지성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어떤 점에서 그는 소박한 신앙인이었고 상아탑의 현장에서 고투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신학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머리의 신학자’라기보다는 ‘가슴의 신학자’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성경무오에 대한 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 성경말씀에의 순종을 강요하였고, 일제하에서는 신사참배를 ‘영적 간음’이자 십계명의 제1,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이를 반대했다.
그는 특히 교회 쇄신의 의지가 강했다. 그의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은 바로 교회의 거룩을 위한 것이었고, 해방 후 친일적 타협주의자들, 신사참배 옹호론자들의 회개와 자숙을 요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영적 쇄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일제에 대한 투쟁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고, 신학교의 설립은 교회를 쇄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회개와 자숙을 교회쇄신운동의 중요한 출발로 보았다. 이것 없이는 영적 쇄신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한상동 목사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려는 운동이었다. 신학교육은 증거와 변증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역사적 과제라고 인식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혹은 행정책임자로 큰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목회사역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국교회를 바로 세워 보자’고 하는 교회 건설의 의지가 그의 생애를 이끌어갔던 축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학을 ‘교회 건설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이 말씀은 한상동 목사가 평생 동안 믿고 확신했던 말씀이었다.
한상동 목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자신의 옥중기 《주님의 사랑》(부산:聖文社, 1945)과 설교집인 《신앙세계와 천국》(부산: 아성출판사, 1970), 《고난과 승리》(부산 :고신대학, 1980)가 있다. 그리고 전기적 기록인 《한상동》(서울: 홍성사, 2009)이 있고, 보다 포괄적인 연구로는 이상규의 《한상동과 그의 시대》(서울: SFC, 200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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