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3월에는 유신헌법 철폐와 정보정치 종식을 요구하는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고, 11월 10일에는 ‘현하 시국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통해 개헌을 요구했다. 1978년 2월 24일에는 각계 인사 65명과 더불어 ‘3·1 민주선언’을 발표했고, 10월 17일에는 ‘국민 선언’을 발표했다. 10·26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령 아래서도 쉴 새 없이 한국의 민주화와 유신체제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복귀와 복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적 인권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신부적 인간화
‘신부적(神賦的) 인간화’는 윤보선 일생의 가장 큰 주제였다. 그는 자신의 집안과 장로교의 터전이었던 에든버러에서 그것을 배웠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가져야 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권리, 일정 수준의 문화생활까지 누려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에 한 사람의 독재나 한 계급의 일방 독주가 허용될 수 없었다. 그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자유, 정의, 질서, 공정성, 윤리적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 신부적 인간사랑, 이런 것들이 당연한 ‘상식’이 되는 한국을 꿈꾸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오도된 것에 저항했고,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을 지켜내려 했다. 독재 정권에 저항했고, 국수적 민족주의를 거절하고자 했다. 공정과 공평의 한국사회를 만들려 했고, 높은 품격의 민주 시민사회의 이상을 지키려 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는 단독자로 하나님을 만나길 원했고, 그런 신앙을 그리워했다. 공평과 정의, 사랑으로서 완성된, 그런 완전한 사회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상적인 목표가 될 뿐이다. 그렇지만 역사 내에서 완전한 나라에 가장 근접한 제도는 오직 민주주의뿐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해위 윤보선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건국의 참여자, 관료 혹은 정치인,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야당의 당수였고, 그리고 민주회복운동에 앞장섰다. 윤보선의 이상은 크고 순수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가 따라오지 못했다. 세상이 그의 목표와 이상이 불가능하다며 온갖 비난을 퍼부어도 그는 고집스럽게 그것을 외쳤다. 그런 것들이 한국의 지표요, 그에게 부여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저항을 계속했을 때 윤보선은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선도자가 되었고, ‘민주화운동의 지렛대’요 ‘버팀목’이 되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의 대부가 된 것이다. 만약 윤보선이 조국 사랑에 대한 열정을 거부했다면 우리는 지금 정도의 정치 민주화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윤씨 문중은 기독교가 자신들뿐만 아니라 한국을 구원시키고, 복음이 근대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사명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에 윤보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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