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교문활동과 의병활동
백범(白凡) 김구는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글을 익히고, 17세에 조선 최후 과거인 경시(慶試)를 보고자 했으나 과거의 폐단에 분노를 느끼고 돌아와 풍수지리서, 관상학, 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1893년 동학이 황해도까지 영향력이 미쳤는데, 18세에 그는 동학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최시형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했다.
1894년 귀향길에 갑오농민전쟁을 목격하고, 그해 9월 삼남으로부터 소식을 받은 그는 7백여 무장 동학군을 지휘하며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 진사 안태훈의 집에 의탁했다. 이 기간에 유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1895년 그는 남만주로 건너가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평북 강계에서 일본군 토벌에 나섰으나 참패했다. 귀국하여 안악으로 오는 중 1896년 2월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언도를 받았다. 1897년 사형 집행 직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범행동기가 보고되어 고종의 선처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 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봉원사)를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었으나 1889년 몇 달 만에 환속했다.
기독교 입교와 독립운동에 투신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 인사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교육 계몽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아버지의 탈상이 끝난 1903년경 친구 우종서 전도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3년 11월 감리회 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 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며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입문한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또한 나라를 위한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한 후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 1907년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1909년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했고,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으로서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9년에는 김홍량과 양산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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