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학생들이 정부 공무원으로 취직하게 되자 많은 조선인들이 다음 해 입학 신청을 한 것에서 아펜젤러는 보람을 느꼈다. 아펜젤러는 1887년에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벽돌로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을 건축하였다. 배재학당은 그해 6월 24일 방학 때까지 재적 43명에 실제 출석 학생 수는 38명, 일정기간만 출석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1년간 63명이 등록하였다. 이 중 박중상과 한용경은 회개하고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다. 1888년 교사가 완공되자 구교사를 기숙사로 활용하고, 근로 장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산업부를 설치하였다. 1889년경에는 기틀이 잡혀 학교의 평판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배재학당의 당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當爲人役)으로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마태복음 20장 27-28절 말씀에 기초하여 섬기고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자세를 교육이념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봉건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개혁적인 교양인의 근대적인 시민과 지도자로 학생들을 양성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조선인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기반 위에서 서구 개화 문명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수업은 영어를 전달매체로 하고 있지만, 한문 고전이 핵심 과목으로,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한문 고전 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교육과정은 예비과정, 교양과정, 대학과정으로 나누었고 각 과정마다 기본 과목으로 영어, 한문, 언문, 문법 등을 개설하였다. 조선인의 문화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신앙적 바탕 위에서 훌륭한 교육기관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복음전파와 독립운동 지원에 힘쓰다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서울지역 최초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인천지역에 내리교회 창립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 아펜젤러는 활동 초기였던 1886년 6월 중순까지 선교를 할 수 없었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주한 외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한국인 노춘경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도우면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 전에 매입하였던 ‘벧엘’(Bethel)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었다. 1888년 5월 왕명으로 중단할 때까지 주일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로부터 2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벧엘교회에서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 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1887년 10월 3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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