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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李商在, 1850-1927) 독립운동가(독립협회~3·1운동), YMCA지도자 ②
임희국(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교회사 및 신학사상사))
 
편집부   기사입력  2019/07/08 [16:32]

의금부 감옥에 있던 수감자들을 찾아와 위로한 이들은 선교사 벙커, 아펜젤러, 게일 등이었다. 특별히 게일은 연동교회 목사로서 조선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고 한문에 능하여 이들의 대화상대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1903년 1월에 감옥 안에 도서실이 설치되면서 성서공회의 후원으로 서양학문 서적과 성경이 차입되었다.

 

이상재는 신약성경을 읽는 중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을 읽으며 감동을 받았고, 요한복음을 적어도 30회 이상 정독했다.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이상재를 비롯한 일부 국사범들을 석방했다.

 

출옥한 이상재는 김정식(경무관), 안국선(조경군수), 유성준(가선대부, 내부경무국장), 이원긍(대제학, 국국기무처의원), 홍재기(중추원의관, 총리대신 비서, 개성군수) 등의 감옥 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게일이 초대 회장으로 있었던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에 가입한다. 

 

을사늑약 이후: YMCA와 함께 영원한 청년으로 살다 

이상재는 1905년 잠시 의정부 참찬으로 머물다가 관직에서 은퇴했다. 그런데 이후 몇 년은 이상재 개인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1907년에 부인 유씨와 장자 승윤이, 1908년에는 둘째 아들 승인이 세상을 떠났다.

 

망국의 한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기기 힘들어 자결을 결심하기도 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장 겸 교육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YMCA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한인민(我韓人民)의 당연(當然)한 의무(義務)”라는 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대한제국의 병의 근원이 무엇이오?…한마디로 급심병이라. 이러한 급심병으로 어찌 생활을 바라겠습니까? 오직 의무는 무엇이오? 하나님의 계명을 정성껏 지켜서…깊은 뜻을 깨달아 저가 무기로 하거든 나는 도덕으로 하고, 저가 포학으로 하거든 나는 인애로 하고, 저가 강제로 하거든 나는 약하게 하면,…선악이 이미 판단되었은즉 하나님께로부터 상벌이 어찌 없겠습니까? 오로지 우리 국민의 의무는 이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이상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성경공부에 집중했다. “진리에 압도당하고, 심정은 변화를 겪었으며, 가슴에 기쁨이 넘치는 중생한 사람”이 인도하는 성경공부로 인해 한 해에만도 754명이 믿기로 작정했고, 875명이 이상재의 사경반에 등록했으며, 만국기도일에는 1,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회관 강당에 모여 구원의 말씀을 들었다.

 

YMCA 총무로 오래 일했던 질레트(P.L. Gillett)는 어느 날 전도집회에서 54명이 믿기로 작정한 다음 이상재가 옆방에 들어가 무릎 꿇고 흐느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기도하는 모습과 같아 감격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상재가 앞장섬으로써 1910년에 시작된 제1회 전국 기독학생회 하령회이다. 이는 국내 청년수련회의 효시이며,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에큐메니컬 집회로 기록되어 있다. 깊은 영적 성장을 위해서 여섯 교단에서 온 소수의 46명만을 모았고, 강사는 16명으로 4개국의 국적을 갖고있었다. 하령회가 거듭되었고, 마침내 1914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가 조직되었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무단정치를 했다. 그리고 1911년에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을 일으켜 눈엣가시와도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했다. 이때 이상재는 셋째 아들 승간이 세상을 떠나 상례를 위해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관계로 화를 면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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