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주기철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일제의 종교정책, 특히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했기 때문에 그의 체포와 투옥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구속된 것은 1938년 2월이었는데, 현존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죄목이었다.
피검 시기와 피검 기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없지 않으나 이때로부터 그는 4차례, 곧 1938년 2월에서 6월까지, 1938년 8월에서 1939년 2월까지, 1939년 9월에서 1940년 4월까지, 1940년 8월에서 1944년 4월 21일 순교 시까지 투옥되어 7년 가까이 고난을 받고 고문을 당했다. 그가 네 번째 투옥되었을 때 평양노회는 주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고, 신사참배 반대의 상징적 보루였던 산정현교회는 폐쇄되었다.
1944년 4월 13일,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극도로 쇠잔해졌고, 병고와 심한 고문으로 육신마저 지체할 수 없어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4월 20일 부인과 마지막 대면했을 때 “내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오리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그 이튿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남기고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47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외로운 감옥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그가 1934년 평양신학교 사경회에서 했던 말, “이 사람이 다른 것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바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는 진실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은 3가지 이유였다. 첫째,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숭배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신사참배는 개인의 신앙 양심과 선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학은 한 사람의 사회적 활동을 규정짓는 가치체계인데, 주기철 목사는 철저한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자였고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교리적 전통과 순전성 혹은 순수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보수주의자였다. 주기철 목사는 친필 기록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37편의 설교가 남아있다.
(공동 집필 (이선이:아태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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