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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南慈賢, 1872-1933) 전도인, 독립운동가, 영화 “암살”의 실존모델 ②
김형석(경희대학교 역사학박사(Ph.D), 전 총신대학교 교수(전임대우)
 
편집부   기사입력  2020/11/23 [19:14]

만주벌의 호랑이가 되다 

1921년 남만주 무장 단체들이 서북파와 기호파로 나누어졌고, 또 안창호 파와 이승만 파로 갈라져 무력충돌이 빚어졌다. 임정에서 김이대(金履大)를 보내어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남자현은 일주간 금식기도를 한 뒤 단합을 호소하는 혈서를 써서 각 단체에 발송했다.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 한 선생은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자들을 소집했다. 그 성의와 순국정신에 감격한 간부들은 누구도 그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한 ‘피의 설유(說諭, 말로 타이름)’에 잘못을 회개하고 쌍방 간에 화합이 성립되었다” - “독립운동의 홍일점 여걸 남자현”, 《부흥》 (1948. 12) 중에서 

 

이렇게 해서 남만주 일대의 무장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통의부(統義府)이며, 김동삼이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2년 9월 남편의 옛 동지인 채찬(蔡燦)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거두어 갔고, 1925년 11월 23일에는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1927년 봄 ‘길림 대검거사건’이 일어났다. 안창호가 길림 조양문 밖에서 독립운동단체 간부와 지역유지 5백여 명을 모아 ‘나석주 의사 추도회 겸 강연회’를 개최하자 일제는 안창호, 김동삼 등 3백여 명을 감금하고 그중에 주요 간부 47인을 체포했다. 남자현은 이들이 석방될 때까지 옥바라지를 하고 구명운동을 펼쳐 전원이 보석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1931년 남자현은 ‘김동삼 구출작전’을 펼쳤다.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길림성까지 침략 손길을 뻗치자 김동삼은 하얼빈으로 거처를 옮기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때 그녀는 친척으로 위장하여 면회하면서 김동삼의 지시를 독립군에 전달했다. 그가 국내로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행동대의 작전이 지연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남자현은 조선과 만주를 수없이 드나들며 군자금 조성과 친일파 제거 등 무장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하였고, 그녀의 이름은 ‘만주벌의 호랑이’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천이백만의 의식을 깨우치다 

1932년 6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의 침략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일본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알리기 위해 왼손 무명지 2마디를 잘라서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썼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중국인 인력거꾼을 통해 조사단에 전달하려다 실패했다. 1933년 초 남자현은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하는 일본 전권대사 무토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2월 29일 거지로 변장하여 권총과 탄환, 폭탄 두 발을 몸에 숨기고 장춘으로 떠나기 위해 하얼빈 교회 정양가를 지나다가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혔다. 조선인 밀정의 밀고로 체포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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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23 [19:14]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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