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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曺晩植, 1883-1950) 장로, 교육자, 독립운동가(3·1운동, 조선물산장려회) ③
김호욱(광신대학교 교수(역사신학), 기독교향토역사연구소 소장)
 
편집부   기사입력  2020/10/22 [17:46]

1944년 주기철 목사가 옥사하고 산정현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자 그는 1945년 봄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5년 조국은 광복을 맞았고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이 밀사 손치웅을 보내 고당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듯은 함께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평양에 남았다. 

 

광복 후의 활동과 순교 

조국이 해방되자 고당은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며 혼란을 수습하려 애썼다. 김일성은 앞에서는 깍듯이 조만식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고급 술집에 데려가 대접하려 하였으나 고당은 술과 여자도 모르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뒤로는 “조만식을 초기에 죽여 없애자”라고 떠들었다고 한다. 고당과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의 북한 점령과정에서 점차 공산주의자들 및 소련과 충돌하게 되자 소련군은 고당이 친 소련적 입장에 서도록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다.

 

1946년 기독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신탁반대운동을 벌이던 고당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김일성 세력에 의해 축출된 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945년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아내 전선애를 불러 호텔에 놓여 있던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하게 한 뒤 세 자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기도한 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남한에 피신한 기독교인들과 미군정, 반공우익 세력들은 그를 월남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는 북녘의 동포들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이승만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하고 전쟁 발발 후 1950년 10월 15일 북한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재무서원들에 의해 순교하였다.

 

조만식은 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고, 1991년 11월 5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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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22 [17:46]  최종편집: ⓒ kid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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