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정치와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토지 약탈이 자행되고 있던 참담한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석구는 농촌지역에서 전도를 통한 국민계몽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그는 1919년 2월 12, 13일경 오화영으로부터 3·1운동에 관한 얘기를 듣자 처음에는 참여를 주저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 이유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용납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여 즉시 대답치 않고 좀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시 뜻을 결정하였다.” -신석구 목사 자서전 중에서
그는 즉시 오화영에게 참가 의사를 밝힌 후 그날 오후 1시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집에서 모인 기독교대표 회합에 참석했다. 이날 민족대표 33인으로 확정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조선 독립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한 그는 재판정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라고 담대하게 대답했다. 결국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스스로 택한 순교자의 길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한 신석구는 당시 일제의 ‘문화정치’에 의한 민족분열정책에도 불구하고 목회와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38년 7월 천안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섬으로써 또다시 항일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는 천안경찰서에 검거되어 2개월 간 구금되었다. 석방 후에도 신석구는 굴복하지 않고 1939년 5월 신사(神社)가 없는 지역인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로 파송 받아 목회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가 신유리교회로 부임한 지 4개월 후에 정춘수 목사가 감독으로 선출되자, 일본 감리교가 한국 감리교를 흡수 통합하는 한국과 일본 감리교의 합동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조선감리회는 해산하고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었으며,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이 되어 일본기독교단의 하부 조직이 되었다.
교단의 반역과 친구의 변절 앞에서 가슴 아파하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시한 신석구는 시국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 때마다 ‘예비 검속’이란 명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장기간 유치장 생활을 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도 용강경찰서에 연행되어 1개월 넘게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5년 5월에는 ‘대동아 전쟁 전승 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설교 도중에 경찰서로 연행되어 광복될 때까지 3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시로써 기록했다.
“생활 중에 감옥생활이 제일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늙고 쇠한 칠십 노인에게랴. 이불 없이 밤을 지내자니 온몸이 떨리고 열흘 동안 씻지 못했더니 얼굴은 온통 먼지뿐. 변소는 바로 옆에 있어 악취가 코를 찌르고, 햇볕조차 들지 않아 정신마저 아득해 물 한 모금 얻어먹기도 어려운데 간수들만 찾아와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네. 귀먹고 눈 어두운 칠십 늙은이를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감옥에 쳐넣으니 하루 종일 말없이 허수아비처럼 앉아서 이내 심사를 하나님께 알려나 볼까나.” -신석구 목사 자서전 중에서
광복이 되자 신석구는 월남을 권유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양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1946년 3·1절 기념방송사건과 1947년 3월 기독교민주당 결사 사건으로 두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9년 4월 진남포에서 반공 단체를 영도했다는 죄목으로 보위부에 검거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평양형무소에 복역중이던 신석구는 1950년 10월 10일에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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