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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잡힌 운동 (출17:8-16) 200호
김철민 목사/대전제일교회, 대기연 회장
 
편집국   기사입력  2019/08/22 [16:19]
▲ 김철민 목사(대전제일교회)     ©편집국

저는 한 때, 테니스를 치다가 허리 고장이 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쪽으로만 하는 운동이 지니는 문제점을 저도 여지없이 겪었는데, 충분한 스트레칭과 더불어 다른 쪽을 강화하는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균형 잡힌 활동가이셨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계시면서, 지시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직접 땅을 밟으시며 인간과 함께 호흡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운용하셨고, 하늘의 하나님이시면서 인자(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존재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냐고 의아해 하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실 정도로 예수님은 균형과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교회의 태동과 성장, 발전, 확산에는 늘 운동이 있었습니다. 경건운동, 성령운동, 기도 운동, 부흥운동 전부 운동입니다. 즉, 기독교는 운동의 역사입니다. 다른 말로 기독교는 역동적이며, 확산적인 운동이지, 인스티튜션(Institution), 즉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제도화 된 순간부터 활기를 잃고 사문화된 교리와 형식에 목매게 되고, 마침내 죽은 교회가 되었음을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모인 이 곳이 찰스 웨슬레, 요한 웨슬레 형제의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그 홀리클럽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이들 형제를 중심으로 나중에 합류한 조지 휘트필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시간과 생활의 절제와 훈련을 법칙화 하는 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경건을 고아원, 양로원, 거리의 부랑아들에 이르기까지 나누며 섬기는 일을 동시에 감당했던 인물들이었던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골방의 경건을 거리의 섬김으로 균형 잡힌 운동을 하였던 것이고, 그 선한 영향력이 당시의 영국을 살렸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전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균형과 조화가 있는 운동은 그래서 오래가고 영향력이 큽니다.

 

초대 교회의 성령 운동은 땅 끝까지 복음 전파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일천 년 중세의 답답한 세월을 지나, 드디어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울려 퍼지고, 아울러 진젠도르프 백작과 필립 슈페너와 프랑케를 위시한 17세기의 경건 운동, 18세기의 복음주의 운동, 19세기 대각성 운동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까지 선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은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현실 그 자체에만 편중된 것도 아니고, 동시에 이상적인 것만 목표로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이며,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었고, 이 세상에 깊이 들어가면서도 또한 한 없이 높은 하늘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기실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가장 효과적이고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을 입으신 예수님을 우리는 닮아가야 합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한 쪽은 배제한 것이 아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복음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지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아말렉의 침공을 이스라엘은 두 가지로 대응합니다. 첫 번째는 모세와 아론과 훌의 기도팀입니다. 이 팀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높이 드는 초월적 영성을 상징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여호수아의 전투팀입니다. 아직 제대로 제식훈련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오합지졸 비슷한 노예 출신 병사들이지만 이들은 현실 속으로 파고 든 내재적 영성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휘를 따라 각각 역할 분담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초월적입니다. 그것은 영적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보좌 앞에 도달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직보 할 수 있는 그 통로를 지성소인 당신의 육신이 찢어지면서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독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지혜롭게도 여호수아에게 군사 선발권을 주고 아말렉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하게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 산 밑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산 위에서는 기도회가 열리는 기이한 이중주가 므리바 골짜기 언저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와 전투를 통해 몇 가지를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과 땅의 이중적인 것처럼 우리의 현실도 영적, 육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 교회에 전도의 열정을 지핀 최권능 목사님이 여섯 번이나 장로회 신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졸업 사정위원회에서 그를 졸업시켜 주려 했지만 항상 시험 성적이 엉망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최 목사님은 “성령도 시험 앞에서는 떠누만!” 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왜 떠시겠습니까? 자신이 준비가 안 된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가 이 둘 사이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원하십니다. 즉,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살펴야만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기도임을 알려 주십니다. 

육적으로 아말렉이 제 아무리 날고 뛰어도 기도하는 노인들의 손이 내려오지 않는 한 결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잘 하는 것에 달린 것 이전에 저 높은 곳에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기도의 두 손을 높이 드느냐에 달렸음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제 아무리 대단한 대적이라 할 찌라도 겁먹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손을 드느냐에 달린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적 전투 이전에 기도의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전투에 나간 이스라엘 병사들은 제대로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노예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도라는 영적 전투에서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게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광야에서 기습하고 강탈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행하던 아말렉 군대를 대적하는 것은 역부족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기꺼이 여호와 닛시의 승리의 깃발을 수여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이 사실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이미 경험한 여호수아에게 귀에 외울 정도로 반복 숙지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한쪽으로만 치우친 신앙이 아닌 양편을 다 아우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날의 승리가 결코 한쪽만이 아닌 균형 잡힌 운동의 결과임을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도 탁월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전에 고린도에서 천막을 사려면 사람들은 누구나 사도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연 그 천막가게에서 샀을 것이라는 말을 누군가 했습니다. 왜?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 사업에도 충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잠언 22:29)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첫째, 자신이 맡은 업무와 사업에 최선을 다해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인 세 사람의 전투 역량은 매우 제한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이들의 육적 영적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기도에는 제한도 없고, 제약도 없습니다. 누워서도 심지어 십자가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배우거나 배우지 못하거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기도 앞에서는 평등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 예수님의 이름 외에 어떤 조건도 걸어두지 않으셨습니다.

 

캐나다의 정치신학자 존 레이콥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와 정치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은 이상적으로, 수단은 현실적으로 가져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합니다. 이상만으로도, 혹은 현실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서구 북미의 교회가 일반 사회의 정치 운동에 흡수되어 이상을 버리거나, 혹은 저 멀리 초월적 신앙 양태로 현실을 포착하지 못하여 결국 오늘날의 피폐한 상활을 맞이한 것은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균형 있는 운동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상과 현실, 초월과 내재, 기도와 현실적 전투의 현장을 주신 것은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조화롭게 사용하라고 하신 것은 아닐지요? 나의 삶에 어느 한 부분만 강하고 어느 한 부분이 약하다면 이것을 빨리 교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영성과 지성, 기도와 현실을 아우르며, 드높은 이상과 깊이 내재하는 영성과 실천을 하시길 기대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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