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신동
좌옹(左翁) 윤치호는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무관 윤웅렬(尹雄烈)과 전주 이(李)씨 사이에서 1864년 12월 26일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후손으로 명문가였으나 가세가 기울어져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윤취동(尹取東)이 아산 둔포면으로 분가 자수성가하여 대지주가 되었고, 아버지 윤웅렬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그는 매우 부유한 가정 덕분에 100칸에 가까운 대저택에서 생활하였고,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한양으로 올라가 한학을 배웠다. 워낙 영특하고 글솜씨가 뛰어났기에 그를 가르친 김정언은 윤치호를 신동이라 불렀다.
일본유학
1879년 15세에 진주 강씨 부인과 혼인한 윤치호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일본 유학은 부친 윤웅렬이 명석한 두뇌에 뛰어난 문장을 지녔지만 서얼로 과거의 길이 막혀 있는 아들을 적자로 입적하고 김옥균과 민영익에게 아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에 더 큰 관심을 보였으며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웠고, 영어도 틈틈이 익혔다. 일본에 있는 동안 동인사를 설립했던 나카무라와 같은 일본의 문명 개화론자들을 만나 가까이 지냈다.
갑신정변과 중국 망명
윤치호는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미국 공사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여 고종과 개화파 사이를 오기며 교량 역할을 하였다.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의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를 주장했고, 각종 정치기구를 개편하여 백성들의 정치 참여와 참정권을 부여해 줄 것을 역설하였다.
윤치호는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개화파 인물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미국 총 영사 스톨을 찾아갔다. 스톨은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운영하고 있는 중서학원에 소개장을 써주었다. 상해에서의 그의 초기생활은 매우 불우했다. 사창가를 수시로 출입하는가 하면 얼마나 심하게 망가진 삶을 살았던지 그를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그냥 되돌아가 다시 추격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기독교 신자로 거듭남
상해에서 방황하던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미국인 선교사였다. 윤치호는 미국 선교사의 설득으로 교회에 나간 뒤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서학원에서 공부에 몰두한다. 그는 중서학원에서 영어, 수학, 화학 등을 수학하였고, 1887년 4월 3일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남감리교회 세례교인이 된 것이다.
미국유학
감리교 교인이 된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9월 28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윤치호는 밴더빌트대학 신학과에 별과생으로 입학하였다. 밴더빌트대학은 갑부 밴더빌트의 기부로 1855년에 세워진 남감리회의 대학이다. 윤치호는 조선의 형편을 미국에 소개함으로써 남감리회가 조선에 큰 관심을 갖게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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