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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일어나라, 부활의 능력으로! (마가복음 16:1~6) 250호
오정무 목사/대전시기독교연합회 회장, 대전동산교회
 
편집부   기사입력  2022/04/19 [13:46]
▲ 오정무 목사/동산교회     ©편집부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2년이 넘도록 거리두기와 여러 가지 일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몸도 마음도 지치고 곤비한 150만 대전 시민들과 2,500여 교회 및 35만 성도들 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희망과 용기가 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으로 함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예수님이 나와 여러분의 주님이시라면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무엇이 불안하십니까?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은 다른 아닌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부패한 권력, 욕망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자라면 그가 누구이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해야만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스승을 은 30세겔에 팔아버리고, 베드로는 고난 받는 예수 앞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변절은 주님에게도 큰 아픔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는 자신이 사랑했던 민중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군중들을 향하여“너희가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타협하였을 때 사람들은 소리 지르기를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이 모든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있었으니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완전히 격리되고 버림받은 죄인으로서의 형벌이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고,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어떤 일에도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도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능치 못하실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태양을 멈추게 하시는 분이셨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인카네이션 하셔서 온갖 수치와 멸시와 능욕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의 죄 값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와 여러분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죄의 대가를 치루시고 그 십자가의 피 값으로 여러분을 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모르고는 아무리 부활을 외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도 없고, 그 십자가의 보혈이 없이는 부활이란 사실도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여러 여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간 그때에도 이 여인들은 그렇게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 올라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운명하시기까지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그 모든 희망과 빛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사모하였습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새벽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사랑은 그 아무것에도 장애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한 [아가8:6]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있게 한 것은 그 손에 박힌 못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다”고 정의한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19가 시작되어 온 세상이 절망적이고, 교회가 예배를 폐쇄하고, 우리들의 신앙도 수면 아래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이 때에도, 코로나19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신 분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처서 주님을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끝까지 그 믿음의 자리를 지키신 목회자와 성도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까? 결국 언젠가는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다시 일상적인 생활로 복귀하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은, 나는 이 고난의 때에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께 무엇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도 목회자로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 밖에는 달리 다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나 혼자 기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그 새벽에 동산의 무덤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들은 동산으로 달려가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걱정하면서 달려갔는데 무덤 문이 열려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들어갔더니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막16:6) 우리 주님 무덤에 계시지 아니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심으로 우리의 주가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오늘날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온 인류가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해 깨어났습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손을 씻으며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모든 사망의 슬픔을 초월하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누구도 인간에게 줄 수 없는 하늘의 안식과 찬란한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분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부활도 아닙니다.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일어난 종교적 부활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오늘 우리시대에, 우리교회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회복의 은혜,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역사 속에는 언제나 절망의 시간이 있었듯이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역사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탈은 절망과 죽음의 시간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방은 조선에게 있어서 죽음의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절망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의 때에 교회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부활과 희망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대각성이었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는 압록강가의 삭주와 창성 지방의 자매들이 행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0리 길을 걸어왔고 멀리 전라도의 목포 무안지방에서도 참석하였습니다.

 

1905년 6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장.감연합공회’를 결성하여 1906년 구정을 기해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부흥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절망의 시대에 전국적인 영적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리교는 남산현교회에서, 장로교는 장대현교회와 남문밖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이 부흥회의 열기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서 개성, 원산, 부산, 대구에서도 신년부흥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1907년 1월에 드디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 남자 사경회 기간 동안에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연속되는 영적 각성을 통하여 조선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절망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큰 소망을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선포된 복음과 회개의 메시지가 성도들만이 아니라 사회개혁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절망의 구름이 이 땅을 덮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죽음보다 강한 부활의 생명으로 조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지만 복음의 소망을 가슴에 담은 수많은 민족 선각자들과 민중들은 민족의 희망을 가슴에 담고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고 마침내 3.1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영적 각성은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사랑하여 주신 선물이었다고 교회사학자들은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이 귀한 자산은 코로나19로 인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오늘날 교회의 희망과 용기를 주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부흥을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가능한 것임을 믿고 이제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의 말씀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다시 이 나라, 이 땅에, 우리 한국교회에 위에 임하기를 사모하며 기도합시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교만한 죄악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헌법조항 속에 동성애와 동성 혼인을 합법화시키는 조항을 넣으려는 시도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습니다만 현재 ‘차별금지법안’이란 이름을 비롯하여 평등법, 건강가정기본법 등을 발의해 국회에서 통과시키려는 법률안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지난 4월 13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남녀간 결합이 아닌 동성 커플 등 다양한 가족형태도 법적인 가족으로 인정되도록 제도를 개선하라는 권고안을 내놓았습니다. 인권위는 13일 국회의장에게 성 소수자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주거·의료·재산분할 등 공동체 생활 유지에 필요한 보호기능 등이 포함된 법률을 제정하도록 권고했구요.

 

여러분! 우리는 모든 만인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 권리라고 배웠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은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기독교회와 건전한 시민단체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이렇게 순교적인 각오로 반대를 하는 것입니까?

 

부활절에 복음을 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테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게 되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느 한 특정단체나 종교, 시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장래와 우리 자손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과 너무나 중요한 관련이 있기에 부득불 잠시만 말씀을 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차별금지법안 반대를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나는 목회자로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차별금지법은 반성경적이고, 생물학적, 윤리적으로도 잘못됐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스리는 저주스러운 일이요 나라가 망하는 망국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7~28)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스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고 살아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탐욕과 죄악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모든 학교에서 동성애와 성전환이 정상이라고 가르쳐야 하고, 우리 자녀들은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성적 취향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병역 의무제인 젊은이들이 군이라는 상명하복이 분명한 집단 속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예측 불허입니다.

 

전통적인 결혼관도 한순간 무너지고 해마다 수 조원씩 쏟아 붓는 국가적 문제인 ‘인구절벽 해소정책’도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연약함을 채울 수 있는 길임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난한 자이든지, 약한 자이든지, 성 소수자이든지 물론하고 그 사람, 그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앉아계신 존경하는 대전지역 의원님들도 진정으로 무엇이 옳은지 생각하고 연구해보시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목숨을 거시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반대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미움과 시기, 수많은 오해와 증오와 다툼의 벽을 자기 몸으로 허무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하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부활의 능력으로 쓰러지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으키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시련과 고난이라도 넘어서는 부활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함께 일어납시다. 주님과 함께 힘차게 나아갑시다. 믿음으로 새벽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에게 찬란한 태양은 떠오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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